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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한다

현실은 그리스 비극이 아니다


나를 겨우 20일 알던 사람이 .... 그리고 클럽에서 정모 때 두번 본 사람이 나를 해코지하려 블로그며 방명록이며 게시판이며 테러를 가했다. 기가 막힌 건, 예전에 다른 사람이 그 녀석에 대해 안좋게 말했을 때 나는 그 녀석은 착한 놈이라고 변호해줬던 일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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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가진 인간이 사소하고 아이러니한 꼬임으로 절망하여 점차 극적인 상황으로 치닫으며 양면성이 낱낱이 드러나는 연약한 존재임을 주지시키는 그리스 비극이라는 문학적 특징이 있다. 그리스 비극 속의 인간은 정말 사소한 사건이 일파만파 되어 운명처럼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그 사건의 처음을 살펴보면 개인의 오해, 잠깐의 실수, 한 인물의 굴절된 정신 등에 기반한 사건들이다.

그리스 비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운명의 아이러니, 결국 정해진 운명을 비켜갈 수 없는 인간, 사소한 것에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로서의 인간, 거대한 신 혹은 운명의 굴레에 결국은 굴복해야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내가 이해한 그리스 비극은 이렇다)

한인간이 있다. 그는 "낙서"를 우연히 안다. 안면을 트고 클럽에서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낙서가 PSP쪽으로 계속 삽질하더니 어느순간부터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있다.
낙서를 개인적으로 안다고 했을 때 (그친구 말투로 보아 상당히 잘난척했을 것이다) 누군가 "너는 낙서 꼬붕이냐?" 라는 말을 한다. 열 받은 그는 공격의 화살을 낙서에게 향한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은 그가 나에게 증오를 품었다는 것.
더 들어가자면 그가 나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는 것.
더 들어가자면 그가 나를 안다는 것.
더 들어가자면 내가 고시원 총무였다는 것.
더 들어가자면 내가 PSP를 구입했다는 것.

그리스 비극이라는 범주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PSP를 구입하는 그 순간부터 이 비극은 준비되었던 것이고, 비극의 발현은 그의 삐뚤어진 생각이었으며, 그의 공격으로 인해 혼란의 소용돌이는 커지고, 내 주변은 황폐화 되며 나는 절망에 빠져야한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등장하는 그 인간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들어 나를 완벽한 파괴로 밀어넣고 엔딩에는 모든 것이 운명이며, 그 인간 역시 운명의 굴레 안에 도는 바퀴 일뿐이라는 내용이 나오면 그리스 비극의 완성이다(여기서 신들이 등장해도 되겠지)

그리스 비극은 물러섬이나 피해감이 없다. 그저 말그래로 비극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스 비극이 아니다. 결국 그 인간의 꼬리는 잡혔고,  비극은 종말을 맞이했다. 더이상 나는 그리스 비극에 갇혀있지 않다.

서양의 극단적인 사고 방식과는 다르게 동양은 "호사다마" 적인 사고관이 있다. 어찌됐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반복되고, 그 와중에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극을 치닫는 법이 없다는 것을 동양적 사고관은 말해준다.

뭐 이렇게 말하면 쉽게 이해가 안가니 좀더 풀어쓰자면, 서양의 문학작품은 "운명"에 집착한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될 운명" 이라는 것이 서양 문학의 근간이다. 누구나 추앙해 마지않는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살펴보면,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운명에 끌려 다닌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매달리며, 햄릿은 운명적인 복수에 모든 것을 건다. 한여름 밤의 꿈도, 리어왕도 운명에 따라 끌려 다니는 주인공들의 흐름을 보여줄 뿐이다(물론 베니스의 상인 같은 작품도 있으나 결국은 대부분의 주인공이 운명에 굴복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이 공통적 흐름은 그리스 문학과 헬레니즘 문학에서 흔히 보여지는 주제이다. 인간은 운명의 소품, 혹은 신의 놀잇감이다.

그러나 동양의 문학은 오히려 운명의 극복을 이야기한다.
우리 나라의 "심청전", "홍길동전", "허생전", 중국의 "서유기", "삼국지", "수호전" 등을 읽어보면, 하나같이 주인공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적극적, 수동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에게는 분명 운명적인 나쁜 일들이 있지만, 그 운명에 굴복하여 끊임없이 추락하는 대신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저항하며 결국은 운명이 아닌 주체적 자신이 삶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들이 운명에 대해 미약하나마 저항하기 시작할 때, 신 혹은 운명적 존재는 그들을 도와주는 조력자 또는 친구로 나온다.

물론 어느 문학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하는가에 따라 위의 이야기는 맞을수도 틀릴수도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 이해를 바탕으로 쓴 글이니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양해 바란다. 이야기가 쓸데없는 방향으로 길어졌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틀에 사는 인간이 아니다. 현실은 그리스 비극이 아니라 호사다마의 사고관에 더욱 부합한다.  

웹에서의 키워들을 볼 때, 그들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이나 그 주변인 같아 보인다. 한방향으로 극단적으로 치닫는 그들의 광기를 보며 소름끼치고 두렵기까지 하다. 파괴와 파괴, 절망과 절망을 반복하는 가운데 그들 스스로 리어왕이 되어 간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결국 모든 딸에게 버림받고 홀로 죽기 직전 가까스로 막내딸에게 구원받는 비참함을 경험하고 싶은 것일까?  그들에게 다른 길은 마치 보이지않는 듯하다.

현실은 그리스 비극이 아니다.
누구도 절대적인 주체자가 될수없다. 우리는 비극인일수도 희극인 일수도 있다. 별거 아닌 일로 스스로 비극을 택하는 비참함을 가지지말자. 당신은 키워가 될수도 예의 바른 사람이 될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웹에서 당신을 평가 할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당신이 쓰는 글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뭔가 주제가 꼬여있지만, 그냥 쓰고 싶었다.